20240423 지하에 살았지만 실은 누구보다 높은 곳에 살았다. 위층사는 집주인만 빼고,
달동네 꼭대기로 가려면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가거나, 아니면 1km남짓되는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구불구불한 길을 가는 마을버스는 멀미가 심해서 늘 걸어 올라가는 쪽을 택한다. 요즘같은 한여름엔 땀에 푹 절고 나서야 열쇠집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현관문을 대면할 수 있었다. 평소엔 있는지도 모르는 스티커들이었는데, 몇 해 전 열쇠를 잃어버려, 전화를 해보니 놀랍게도 아직 영업을 하는 번호였다.
당연히 에어컨이 없는 달동네의 집들은 여름에 모두 창문을 열어놓기 마련이다. 덕분에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반지하집의 살림을 훤히 구경하게 된다. 출퇴근 길이 반복되면 열린 창문 영역만큼 남의 집 살림을 외울 수 있다.
어느 날은 언덕 중간 쯤 있는 창문에서 반지하 방에 걸려있는 어떤 할머니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는 못보던 사진이었다. 단칸방 반지하에 걸린 사진이고, 단칸방의 주인이 매일 소주를 사갖고 들어가는 50줄 아저씨라는 사정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막연히 근래에 어머니가 돌아가셔 사진을 걸었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날엔 할머니의 사진이 엉뚱한 집 전봇대 밑둥에 버려져 있었다. ‘무슨 사연이지?’ 내심 불안했다. 창문으로 보이는 단칸방의 다른 살림은 멀쩡하고 아저씨도 멀쩡히 술을 사들고 내려왔다. ‘이제 어머니를 그만 기리기로 하셨나, 아니 그래도 어머니 사진을 이렇게 버릴수가 있나...’ 잡다한 생각을 잠깐 하고는 이내 잊어버렸다. 먹고살기 힘든 달동네의 박복한 사정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다른 어느 날, 그 할머니의 사진이 다른 반지하 집에 걸려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버려진 남의 사진을, 그것도 영정사진같은 사진을 주워다 걸어놓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사진이 원래 있던 집의 아저씨도 그대로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언덕을 오르던 느린 걸음을 순간 멈추고 남의 집 안에 있는 사진을 멍하니 볼 수 밖에 없었다.
마침 그 집에 있던 사람이 방으로 들어오며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황급히 고갤 돌려 걸음을 재촉했지만, 그 수상한 광경을 머리에서 떨쳐버릴 수 없었다. 도대체 그 사진이 왜 딴 집에 걸려있는 거지? 유일한 가능성은 두 집이 혈연지간이라던가, 사실은 내가 모르는 아주 유명한 할머니라던가 따위의 희미한 가능성 밖에 없었다.
며칠째 이 흥미로운 사건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늦은 오후 땀에 푹 절어 언덕을 올라와 현관을 열자, 떡하니 그 할머니의 사진이 우리집 벽에 걸려있었다. 원래 내 유치원 졸업사진이 걸려있는 곳이었다. 옆에는 동생의 돌사진이 그대로 걸려있었다. 거기에 아주 정확하게, 그 할머니의 시선이 그대로 나에게 꽂혔다.
남의 집 사정이었던 흥미로운 사건은 이제 우리집 사정이 되었고 공포가 되었다. 가족에게 물어봐도 나와 같은 반응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들어보았다. 아무런 메세지도, 이상한 점도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우리 할머니인 것 처럼 동생의 돌사진 옆에 반듯이 걸려있었다.
황망히 사진을 들고 골목으로 나갔다. 누구든 붙잡고 이 할머니를 아시냐고 물어야 했다. 경찰에 신고를 하는게 먼저였겠지만, 순간의 공포가 이성적 판단을 흐려놓았다. 하지만 골목에 나와봤자 방법이 없었다. 달동네는 인구밀도에 비해 유동인구가 적은 곳이다. 멍하니 사진을 들고 있는데 등 뒤에서 떨겅떨겅 비닐봉지 속 소주병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처음 사진이 걸려있던 집에 살던 그 아저씨다. 황급히 몸을 돌려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혹시 이 할머니 아시는 분이세요?”
모른다고 하면 어쩌지를 걱정하며 다급히 물어보았는데, 다행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염병! 내가 그 쌍판을 또 보네 씨팔.. 이번엔 그 집이야?“
아저씨는 짜증을 내면서도 마침 말상대가 생겨서 잘됐다는 듯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는 동네 열쇠공 할아버지의 돌아가신 부인이었다. 부인이 치매에 걸리는 바람에 출장을 나갈 때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데리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문을 따고 나면 할머니는 거기가 우리집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동네에서 할머니의 치매는 유명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안가 이번엔 치매가 할아버지에게 찾아왔다. 할아버지의 치매는 할머니의 것이 오롯이 옮겨간 듯 했다.
할아버지는 전에 문을 열었던 집들을 돌며 돌아가신 할머니를 찾아 다녔다. 아마 할머니가 거기가 집인줄 알고 들어가 계실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치매도 뺏어갈 수 없는 능숙한 기술로 문을 따고 나서 들어가면 그 집에 사람이 있는 경우도, 없는 경우도 있었을테니 놀란 거주자가 경찰에 신고를 해, 동네에선 난리가 몇 번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봤자, 박복한 달동네의 소문은 의외로 퍼지지 않아서, 그 인근 두 세집만 아는 일들이었다. 새벽에 출근해서 밤중에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의 수명이 길지는 못했으리라.
그런데 집 안에 사람이 없는 경우에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사진을 그 집에 걸어놓은 모양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문을 딴 집을 자기 집이라 여기고 사진을 걸었는지, 아니면 거주자에게 이 할머니를 보면 연락을 달라는 메세지였는지, 혹은 그 집이 우리집이라고 고집을 부렸던 할머니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는지,
“염병할 똥개훈련도 아니고 내가 무슨 사진 주워다 주는 사람이야? 노망나서 염병을 떨고 자빠졌네 노인네, 아이고 썅!”
아저씨는 내 손에서 사진을 빼앗아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아마 집에 걸려있던 사진, 전봇대 밑에 버려져 있던 사진을 매번 열쇠집에 다시 가져다 준 사람이 아저씨였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만취해서 열쇠집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저씨를 본 것 같기도 하다.
도둑이 든 게 분명하다며 길길이 날뛰며 이미 경찰에 신고까지 한 어머니께 사정을 설명드리니 불같은 성격의 어머니가 의외로 깊은 한숨 한번으로 사건을 털어버리셨다. 그러고 보니 외할아버지도 치매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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